유럽과 미국의 디지털 유산 법제도 비교
디지털 유산,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닌 ‘법과 정책’의 문제
디지털 공간은 이제 단순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아니라, 개인의 삶 전체를 저장하는 정보 자산 공간이 되었다. 사진, 메시지, 영상, 문서, 암호화폐, 이메일, 소셜 미디어 계정 등은 모두 한 사람의 정체성과 기억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로 작용한다. 이러한 디지털 자산들이 개인의 사망 이후에도 고스란히 남게 되면서, ‘디지털 유산(digital legacy)’이라는 개념은 이제 법 제도적으로도 다뤄야 할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국가마다 제도적 접근 수준이 매우 다르다. 특히 유럽연합(EU)과 미국은 각각 데이터 보호 중심의 유럽식 접근과 재산권 중심의 미국식 접근이라는 상이한 법률 체계를 가지고 디지털 유산 문제에 대응하고 있다.
두 지역 모두 디지털 자산의 폭발적 증가와 함께 사망 이후 개인정보 처리, 계정 상속, 유족 접근 권한 등 다양한 쟁점을 제도화하고 있지만, 그 방식과 우선순위는 확연히 다르다. 이 글에서는 유럽과 미국의 디지털 유산 관련 법 제도를 비교하고, 그 차이점과 시사점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유럽연합: 데이터 보호를 최우선으로 하는 ‘사후 정보 권리’ 중심 모델
유럽연합(EU)은 개인정보 보호에 매우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지역으로, 디지털 유산 역시 이 연장선상에서 다뤄지고 있다. 2018년에 시행된 **GDPR(일반 개인정보 보호 규정)**은 유럽 전역의 개인정보 보호 기준을 통일한 법률로, 생존자의 데이터뿐만 아니라 사망자의 개인정보 처리에 대해서도 간접적으로 규제하고 있다.
GDPR은 사망자 데이터에 대한 명시적 조항을 포함하지는 않지만, 각 회원국이 자국의 법률에 따라 사망자의 개인정보 보호 범위와 유족의 권한을 설정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는 2016년 디지털 법(La Loi pour une République numérique)**을 통해 사용자가 사망 전에 자신의 디지털 자산 처리 방식(삭제, 이관, 보존 여부)을 사전 지정할 수 있도록 했다. 사용자는 플랫폼에 공식적인 지침을 등록하거나 유언장을 통해 자신의 계정 처리 방식을 명확히 남길 수 있으며, 이 경우 해당 플랫폼은 유족 요청보다 사용자 생전의 지시를 우선하여 처리해야 한다.
또한 유족이 사망자의 이메일이나 SNS에 접근하고자 할 경우, 법적으로 관계 증명서와 요청 근거를 제시해야 하며, 플랫폼은 유족이 정보에 접근할 합리적인 사유가 있다고 판단되면 부분적으로 데이터를 제공할 수 있다. 다만, 유럽은 어디까지나 ‘사생활 보호가 최우선’이라는 철학이 뚜렷하기 때문에, 유족의 요청이 사망자의 프라이버시 침해 우려가 있을 경우, 계정 폐쇄는 가능하되 콘텐츠 열람은 제한되는 경우가 많다.
결국 유럽은 디지털 유산을 정보 권리의 연장선으로 간주하며, 상속보다는 정보 보호와 생전 결정권 강화에 초점을 맞추는 방식으로 제도화를 이끌고 있다.
미국: 재산권 중심의 실용적 ‘계정 상속’ 중심 모델
미국은 디지털 유산 문제에 대해 보다 실용적이고 재산권 중심의 접근을 취한다. 대표적인 제도는 2015년 미국 변호사협회(Uniform Law Commission)에서 제정한 **‘디지털 자산 접근 및 관리 통일법(RUFADAA, Revised Uniform Fiduciary Access to Digital Assets Act)’**이다.
이 법은 미국 내 대부분의 주(2024년 기준 46개 주 이상)에서 채택되어 시행 중이며, 사망자 또는 무능력자의 디지털 자산에 대해 법정 상속인이 접근할 수 있는 법적 절차와 권한을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RUFADAA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사용자가 생전에 디지털 유산 관리자(Legacy Contact)를 지정했거나 유언장에 명시했을 경우, 플랫폼은 이를 따를 의무가 있다.
- 사망자가 아무런 설정 없이 사망했더라도, 상속인은 법원의 명령서 및 증빙서류를 통해 디지털 자산 열람을 청구할 수 있다.
- 이메일, 사진, 문서, 금융 관련 정보 등은 디지털 자산으로 간주되며, 접근이 가능하다.
- 단, 사적인 메시지나 비공개 콘텐츠는 생전 명시된 허가 없이는 열람할 수 없다.
미국의 이 같은 제도는 기본적으로 ‘디지털 자산도 재산이다’는 입장에서 출발하며, 플랫폼의 약관보다는 법률과 유언장이 우선된다는 점에서 유럽과 차이를 보인다.
또한, 구글(구글 인액티브 계정 관리자), 애플(디지털 유산 연락처), 페이스북(계정 관리자) 등 미국 기반의 빅테크 기업들은 RUFADAA를 기준으로 생전 설정 기능을 강화하고 있으며, 이는 사용자 개인이 사망 후 자신의 계정을 어떻게 처리할지 능동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기반이 되고 있다.
유럽과 미국의 결정적 차이점: ‘보호’와 ‘접근’의 충돌
유럽과 미국의 디지털 유산 제도는 모두 개인의 죽음 이후 남겨지는 디지털 흔적을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 접근 방식은 전혀 다르다.
유럽은 ‘개인의 사생활 보호’와 ‘정보 통제권’을 중시하며, 사용자의 생전 의사가 무엇이었는지를 우선시하는 반면,
미국은 ‘디지털 자산의 재산적 성격’에 초점을 맞추어 상속인이나 대리인의 ‘접근 권리’를 폭넓게 인정하는 방식이다.
이 차이는 실제 계정 처리 방식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어 유럽 플랫폼은 사용자의 생전 지시 없이는 유족에게 이메일이나 사진에 대한 접근을 허용하지 않지만, 미국의 경우 유언장이 있거나, 법적 상속인이 정당한 이유를 제시할 경우 대부분의 데이터를 제공받을 수 있다.
또한 미국은 법적으로 **‘플랫폼의 약관은 유언이나 법률에 우선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하기 때문에, 플랫폼에서 아무리 ‘계정 양도 불가’ 조항을 명시했더라도, 유언장이 존재하면 상속인이 법적으로 우선권을 갖는다. 반면 유럽은 플랫폼의 약관과 사용자의 개인정보 보호가 매우 강하게 작용하여, 유언장보다 약관이 우선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유럽은 보호, 미국은 접근에 방점을 찍는 제도적 방향을 따르고 있으며, 양쪽 모두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지만 한국에는 두 체계가 모두 중요한 참고점이 될 수 있다.
한국이 참고해야 할 점과 제도 정비 방향
한국은 현재까지 디지털 유산에 대한 단일 법령이 존재하지 않는다. 민법, 개인정보 보호법, 정보통신망법, 저작권법 등이 개별적으로 존재하지만, 이들이 디지털 유산을 통합적으로 다루지는 못하고 있다. 유럽이나 미국처럼 명확한 디지털 자산 정의, 사망자 데이터 접근 절차, 유언장의 법적 우선성, 플랫폼의 의무 조항 등이 아직 법률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은 유럽과 미국의 제도를 절충한 방식으로 입법할 필요가 있다.
- 유럽처럼 생전 사용자의 사적 지시를 존중하되,
- 미국처럼 상속인의 접근을 법률적으로 보장하고,
- 플랫폼 약관에만 의존하지 않고 국가 단위의 디지털 자산 보호 및 이관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특히 한국은 카카오톡, 네이버, 쿠팡, 토스 등 국내 플랫폼 중심의 서비스 사용이 많기 때문에, 이들 기업에게도 사망자 계정 처리에 대한 법적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통일된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디지털 자산 접근권이 곧 유족의 알 권리이자 고인의 의사 존중이라는 인식 하에, 사용자 생전 설정, 유언장 내 디지털 항목 명시, 상속인의 법적 요청 등 여러 요소가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